[포커스] 정부는 왜 바나듐에 집중하는가
2026-10-26
스탠다드에너지가 일본 교토 MK 택시 본사에 설치한 바나듐 이온 배터리 ESS / 스탠다드에너지 제공
[투데이에너지 김원빈 기자] 제주 전력망에 들어설 ESS의 윤곽이 입찰 공고로 드러났다. 전력거래소는 지난달 22일 육지와 제주를 합쳐 순간 최대방전량 1.18GW, 최대저장량 7.08GWh(6시간) 규모의 3차 ESS 중앙계약시장 경쟁입찰을 공고했다. 앞선 1·2차가 육상 기준 각각 500MW(3.0GWh)였던 점을 감안하면 역대 최대다. 낙찰자는 11월 중 확정된다.
눈길을 끄는 건 80MW(480MWh) 규모의 제주 입찰이다. 전력거래소는 비리튬계를 고려해, 하루 두 번 충·방전이 가능하면 기존 15년인 계약기간을 25년으로 늘려주기로 했다. 풍력 비중이 높은 제주 계통에는 장수명과 장주기, 반복 충전 제약이 덜한 ESS가 필요하다는 이유다. 비리튬계 흐름전지를 염두에 둔 조건이다. 정부는 왜 바나듐에 주목하는가.
철강의 비타민, 배터리가 되다
바나듐(V)은 원자번호 23번의 은회색 금속이다. 지금도 쓰임의 80% 이상은 건물 철근과 자동차 부품 등 철강이다. 소량만 넣어도 강도와 인성이 높아져 '철강의 비타민'으로 불렸다. 스탠다드에너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바나듐 생산량은 약 11만 톤이고, 이 중 중국이 약 8만 2천 톤, 러시아가 약 2만 1천 톤을 차지한다.
이 금속이 배터리 소재가 된 건 산화상태가 2, 3, 4, 5가로 바뀌는 성질 덕분이다. 한쪽에는 2가와 3가 사이를, 다른 쪽에는 4가와 5가 사이를 오가는 바나듐 용액을 두면 하나의 원소로 양쪽 전극 역할을 모두 할 수 있다. 양쪽에 다른 금속을 쓰는 방식과 달리 용액이 섞여도 되돌릴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1980년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 연구팀이 이 원리로 특허를 냈고, 태양광·풍력이 늘며 ESS 수요가 커지자 다시 주목받게 됐다.
산화 상태별 바나듐 전해액 샘플/김원빈 기자
같은 바나듐, 다른 기술
바나듐 기반 저장 기술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VFB)다. 전해질을 외부 탱크에 담아 펌프로 순환시키며 스택에서 전기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구조다. 저장 용량은 탱크 크기로, 출력은 스택 규모로 따로 설계할 수 있어 저장 시간을 4시간에서 10시간으로 늘리려면 탱크만 키우면 된다. 수계(물) 전해질을 쓰기 때문에 화재 위험이 낮고, 20년 이상 운영해도 용량 감소가 거의 없다. 반면 탱크·펌프·배관 때문에 설치 공간이 크고 같은 부피당 저장량이 리튬이온보다 적다. 출력 한계, 누수 위험, 바나듐 가격 변동의 영향도 한계로 지적된다.
다른 하나는 스탠다드에너지가 개발한 바나듐 이온배터리(VIB)다. 흐름전지처럼 바나듐의 성질을 쓰되, 탱크와 펌프 없이 용액을 셀 안에 담았다. 회사 측은 에너지 효율 97% 이상, 5만 회 이상 충·방전이 가능하고, 1시간에 네 번 충·방전할 만큼 출력이 높다고 밝혔다. 정리하면 흐름전지는 장주기에, VIB는 순간 출력이 필요한 곳에 강점이 있어 같은 '바나듐'이어도 쓰임이 다르다.
원료 수급과 에너지 안보
정부가 비리튬계에 주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공급망이다. 에이치투 한신 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리튬 공급망이 특정 국가의 영향력 아래 있고 남미 '리튬 트라이앵글'의 자원 국유화 움직임에도 취약하다고 짚었다.
반면 바나듐은 광산 채굴뿐 아니라 철강 공정 부산물인 스틸 슬래그, 원유 정제 과정의 폐촉매에서도 추출할 수 있어 확보 경로가 다양하다는 설명이다.
한국이 정유·석유화학 강국인 만큼 국내 정유 단지의 탈황 폐촉매를 재활용하기만 해도 연간 600MWh 규모 전해액을 만들 수 있는 바나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폐기물을 전략 자산으로 바꿔 에너지 자립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에이치투는 전해액을 현지에서 생산해 물류비를 줄이는 방식도 운영한다고 밝혔다.
물론 과제는 남는다. 세계 생산이 중국에 쏠려 있다는 점은 업계도 부인하지 못한다. 폐촉매 재활용이 중국 의존을 얼마나 낮출 수 있을지는 확보 가능한 물량이 결정한다.
에이치투 K1 플랜트 전경/김원빈 기자
정부는 왜 주목하는가
정부의 방향은 올해 정책과 이번 공고에서 함께 읽힌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 2월 '차세대 분산형 전력망 추진계획'을 발표했고, 5월 13일 김성환 장관이 에이치투, 스탠다드에너지, 한국기계연구원을 잇달아 찾아 후속 점검에 나섰다.
정부는 재생에너지 확대로 심해지는 계통 불안정에 대응하려면 8시간 이상 장주기 저장(LDES) 확보가 핵심이라고 본다. 비리튬계는 화재 위험이 낮고 범용 소재를 쓸 수 있어 공급망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김 장관은 "장주기 에너지저장장치의 기술 다변화와 조기 상용화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방문지에는 바나듐 외에 한국기계연구원의 액체공기 에너지저장(LAES) 실증 현장도 포함됐다. 정부가 바나듐 하나만 보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최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의원 17명도 대전 스탠다드에너지 본사를 찾아 VIB 생산 라인 ‘V-Line’과 셀 관통 안전실험을 참관했다. 의원들은 바나듐 공급망 안정성과 양산 계획도 물었다. 스탠다드에너지는 리튬계에 편중된 국내 ESS 시장에서 비리튬 기술도 실증·사업화 기회를 얻어야 한다며 제조 스타트업의 스케일업 지원을 건의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김성원 위원장 등 위원들이 13일 차세대 배터리인 바나듐 이온 배터리 및 ESS를 개발, 상용화한 스탠다드에너지를 방문해 회사 관계자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스탠다드에너지 제공
일본도 비리튬 몫을 따로 뗐다
일본은 비리튬계를 제도 안에서 따로 키우고 있다. 올해 5월 결과가 나온 일본 장기탈탄소전원 입찰(2025년도)에서 배터리는 1.25GW가 낙찰됐다. 리튬이온이 551MW, 리튬이온 이외 배터리가 약 700MW로, 비리튬이 절반을 넘었다. 일본은 이 입찰에서 리튬이온·양수 리플레이스와, 비리튬 배터리·양수 신설·LDES를 별도 카테고리로 나누고 각각 상한을 뒀다. 리튬과 가격 경쟁을 하지 않도록 비리튬 몫을 따로 확보해 준 구조다. 비리튬 카테고리 낙찰은 88.6만kW로 상한 40만kW를 웃돌았다.
요건도 강화했다. 올해 입찰부터 운전 지속시간 6시간 미만 배터리를 대상에서 뺐고, 셀 제조국 한 곳이 낙찰 총량의 30% 이상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제한을 리튬·비리튬 모두에 적용했다. 경제산업성은 NAS전지와 레독스 플로우 전지를 일본 기업이 앞서 있는 영역으로 규정했다.
국내 업체 현황
흐름전지에서는 에이치투가 앞서 있다. 2013년 국내 최초로 상용화했고, 회사 측은 연 330MWh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췄으며 1.2GWh 규모의 제2공장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한국동서발전과는 울산 화력발전소 부지에 20MWh 규모 흐름전지 ESS를 구축하고 있는데, 도매 전력시장에 직접 참여하는 국내 첫 사례로 제시했다. 해외로는 스페인 8.8MWh 프로젝트가 마무리 단계다. 한 대표는 글로벌 상위 5개사(티어 1)에 든다고 주장했다.
스탠다드에너지는 2023년 VIB 단체표준과 한국전기설비규정 등재를 거쳐 2024년 인증을 받았다. 지난 7월 일본 교토에서 전기차 초급속 충전기와 연계한 첫 해외 실증을 시작했고, 8월에는 자동화 라인에서 만든 제품을 처음으로 고객에게 납품했다. 데이터센터와 초급속 충전소 등 고출력이 필요한 곳이 주 타깃이다.
남은 변수
11월 낙찰 결과가 첫 시험대다. 가격 비중이 절반인 입찰에서 초기 비용이 높은 흐름전지가 리튬과 어떻게 경쟁할지, 제주가 비리튬에 열어준 25년 계약이 실제 낙찰로 이어질지가 관건이다. 정부가 말하는 장주기와 비리튬 육성이 낙찰로 확인될지, 일본처럼 제도 설계로 몫을 보장해야 하는지, 업계와 정부가 답해야 할 때가 됐다.
출처 : 투데이에너지